맨위로가기

윌리 스타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윌리 스타젤은 1940년에 태어나 2001년에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활약했다. 그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주전 좌익수와 1루수를 맡았으며, 1979년에는 월드 시리즈 MVP,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통산 475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다수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8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코치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제너럴 매니저 보좌를 역임했으며, 신장 질환 연구를 지원하는 윌리 스타젤 재단을 설립하여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앨러미다 (캘리포니아주) 출신 -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
    제임스 해럴드 둘리틀은 1896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알래스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도쿄 공습 지휘, 쉘 석유 회사 부사장 역임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계기 비행 기술 개발에 기여하고 1993년에 사망했다.
  • 앨러미다 (캘리포니아주) 출신 - 자스민 사보이 브라운
    자스민 사보이 브라운은 드라마, 영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Orange Wine"과 같은 자작곡을 발표하며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선보이는 미국의 배우이자 음악가이다.
  • 오클라호마주 출신 야구 선수 - 미키 맨틀
    미키 맨틀은 "코머스의 혜성"이라 불린 뉴욕 양키스의 뛰어난 스위치 타자 출신 중견수로, MVP 3회 수상과 트리플 크라운 달성 등 숱한 업적을 남기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오클라호마주 출신 야구 선수 - 랠프 테리
    랠프 테리는 1956년부터 1967년까지 MLB에서 투수로 활동한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로, 뉴욕 양키스 시절 1962년 아메리칸 리그 최다승과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했으며 은퇴 후 프로 골프 선수로도 활동했다.
  •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 - 커트 실링
    커트 실링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투수로 활동하며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통산 3,000탈삼진을 달성하고 은퇴 후에는 ESPN 해설가로 활동했으나 해고되었고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 - 존 레스터
    존 레스터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6시즌 동안 활약하며 200승을 기록하고 여러 팀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좌완 투수이다.
윌리 스타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5년 윌리 스타젤
1965년
포지션좌익수 / 1루수
타석좌타
투구좌투
출생일1940년 3월 6일
출생지미국 오클라호마주 얼스보로
사망일2001년 4월 9일
사망지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
선수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일1962년 9월 16일
데뷔 팀피츠버그 파이리츠
최종 리그MLB
최종일1982년 10월 3일
최종 팀피츠버그 파이리츠
선수 경력피츠버그 파이리츠 (1962–1982)
통계 (MLB)
타율.282
안타2,232
홈런475
타점1,540
수상 및 업적
올스타 선정7회 (1964–1966, 1971–1973, 1978)
월드 시리즈 우승2회 (1971, 1979)
내셔널 리그 MVP1979년
월드 시리즈 MVP1979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1979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1974년
내셔널 리그 홈런왕2회 (1971년, 1973년)
내셔널 리그 타점왕1973년
영구 결번피츠버그 파이리츠 No. 8
명예의 전당파이리츠 명예의 전당
명예의 전당 헌액
종류전국구
헌액일1988년
득표율82.4% (첫 투표)
코치 경력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986 - 1988)

2. 어린 시절

1940년 3월 6일 오클라호마주 얼스보로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잠시 플로리다주에 있는 이모에게 맡겨졌다가, 이후 어머니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2] 그는 엔시날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야구부에서 활동하며 훗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선수가 되는 토미 하퍼, 커트 모튼과 함께 뛰었다.[3] 1959년 피츠버그 파이리츠 구단과 계약을 맺고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 입문했다.[3]

스타젤은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 팜 팀 소속으로 뉴멕시코주, 노스다코타주, 아이오와주, 텍사스주, 노스캐롤라이나주, 오하이오주 등 여러 지역을 거치며 마이너 리그 선수 생활을 했다.[3] 이 시기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심각한 인종 차별을 겪어야 했다. 원정 경기를 다닐 때 백인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 수 없었고, 해당 지역의 열악한 흑인 거주지 숙소를 이용해야만 했다.[3] 특히 텍사스주 플레인뷰에서는 경기에 출전하면 총으로 쏘겠다는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출전했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20] 계속되는 인종 차별 때문에 야구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야구 스카우트 밥 저크의 격려 편지를 받고 용기를 얻어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23]

3.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선수 생활 전체를 보낸 윌리 스타젤은 특유의 강력한 타격과 따뜻한 리더십으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키 약 1.83m 약 7.62cm에 긴 팔을 가졌으며, 배트 손잡이 끝부분만을 잡는 독특한 타격 준비 자세와 쇠망치로 몸을 푸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그의 스윙은 마치 베이브 루스처럼 거대한 홈런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20] 팬들에게는 '윌리'라는 애칭으로 친숙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본명인 '윌버'를 더 선호했다고 전해진다.[20]

1962년 9월 16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한 스타젤은[5] 1964년부터 주전 선수로 발돋움하여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고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960년대 후반 잠시 부진을 겪기도 했으나, 1969년 타율 .307, 29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부활했다.

1970년대는 스타젤과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황금기였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알 올리버, 데이브 파커 등과 함께 팀의 중심 타선을 이끌며 6번의 지구 우승과 2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1971년, 1979년)을 이끌었다. 그는 1971년1973년 두 차례 홈런왕에 올랐으며, 특히 1973년에는 다저 스타디움 역사상 유일한 장외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는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1979년, 3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팬들과 동료들에게 '팝스(Pops,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존경받았고, 팀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월드 시리즈 MVP와 더불어 정규 시즌 MVP까지 석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최고령 MVP 수상 기록이다.

스타젤은 1982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 475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피츠버그 파이리츠 구단 역사상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의 등번호 '''8'''번은 은퇴 직전인 1982년 9월 6일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선수 시절 내내 강력한 장타력을 선보였으며, 여러 구장에서 최장거리 홈런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3. 1. 1960년대

1962년 시즌 후반인 9월 16일, 22세의 나이로 좌익수로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5] 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인종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마이너 리그 시절, 특히 텍사스주 원정에서는 팀 동료들과 다른 숙소에 묵어야 했고, 총격 위협까지 받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1963년 신인 시즌은 타율 .243, 11홈런, 47타점으로 다소 부진했지만, 1964년부터 주전 선수로 자리 잡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해 스타젤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주전 좌익수로 시즌을 시작하고 마쳤으며, 1루수로도 상당 기간 출전했다. 4월 17일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고,[5]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도 했다. 또한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65년1966년에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두 해 모두 100개 이상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1965년에는 타율 .272, 27홈런, 107타점, 1966년에는 타율 .315, 33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MVP 투표에서 각각 14위와 15위에 올랐다. 특히 1965년 6월에는 타율 .330, 10홈런, 35타점의 뛰어난 성적으로 자신의 통산 세 번의 내셔널 리그 이달의 선수상 중 첫 번째 상을 수상했다.

1966년 피츠버그에서 선수 생활 초기의 스타젤


그러나 1967년, 비시즌 동안 체중 관리에 어려움을 겪으며 약 106.59kg의 체중으로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다. 구단은 그에게 약 97.52kg까지 감량하라고 지시했지만, 급격한 감량은 오히려 타격 부진으로 이어졌다. 그의 타율은 전년도 .315에서 .271로 크게 떨어졌고, 홈런 수도 33개에서 20개로 감소했다. 1968년 시즌 전, 구단은 스타젤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했지만, 그해에도 타율 .237, 24홈런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당시 감독이었던 래리 셰퍼드는 스타젤의 몸이 너무 근육질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6]

1969년, 스타젤은 타율 .307, 29홈런, 92타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고, MVP 투표에서 21위를 기록하며 1960년대를 마무리했다.

3. 2. 1970년대

1970년 윌리 스타젤은 타율 .264, 31홈런, 85타점을 기록하며 MVP 투표에서 15위에 올랐다. 그해 8월 1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5개의 장타(3개의 2루타, 2개의 홈런)를 기록했다. 이는 루 보드루(1946년)와 조 애드콕(1954년)에 이어 한 경기 5장타를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였다.[20] 이 경기는 전국 방송으로 중계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방송 중 퀴즈는 "한 경기에서 5개의 장타를 기록한 선수는 누구인가?"였고, 스타젤이 그 경기에서 세 번째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같은 경기에서 동료 밥 로버트슨 역시 홈런 포함 5안타를 기록했다. 2012년 앤드루 매커친과 개릿 존스가 기록하기 전까지 파이리츠 역사상 한 경기에서 두 명의 선수가 5안타를 기록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197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1960년 월드 시리즈 우승 이후 처음으로 내셔널 리그 동부 우승을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NLCS에서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배했다. 스타젤은 이 시리즈에서 12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양 팀 통틀어 가장 많은 안타를 쳤다.

1971년, 31세의 스타젤은 선수 경력의 새로운 정점을 맞이했다. 시즌 마지막 주까지 이어진 경쟁 끝에 48홈런을 기록하며 행크 애런(47홈런)을 제치고 자신의 첫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는 당시 파이리츠 역사상 랄프 키너가 1949년(54개)과 1947년(51개)에 기록한 것에 이어 단일 시즌 최다 홈런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는 4월과 6월에 각각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했지만, MVP 투표에서는 조 토레에 밀려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해 파이리츠는 1971년 월드 시리즈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7경기 만에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파이리츠가 시리즈 첫 두 경기를 패하자, 스타젤은 언론이 이를 "성 발렌타인데이 대학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언급하며 팀의 반격을 이끌었다.

1972년에도 스타젤은 타율 .293, 33홈런, 112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고, MVP 투표에서 조니 벤치와 빌리 윌리엄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1973년 스타젤은 2루타(43개)와 홈런(44개) 부문에서 동시에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드문 업적을 달성했다. 이는 1940년 행크 그린버그 이후 처음 나온 40-40(2루타-홈런) 기록이었다. 그는 이 해에 데이브이 존슨(43개), 데럴 에반스(41개), 행크 애런(40개)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개인 통산 두 번째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타점(119개)과 장타율(.646)에서도 리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3년 연속으로 MVP 투표에서 피트 로즈에게 밀려 2위에 머물렀다. 같은 해 다저 스타디움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기록된 장외 홈런을 치기도 했다.

여러 포지션을 거친 후, 1975년 시즌부터 스타젤은 영구적으로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은퇴할 때까지 1루를 지켰다.

1977년 6월 29일, 스타젤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400번째 홈런을 기록했다.

1978년, 스타젤은 좋은 플레이를 하거나 좋은 경기를 펼친 동료 선수들의 모자에 자수로 놓인 "스타젤 스타스(Stargell Stars)"를 달아주는 관행을 시작했다. 이는 팀의 사기를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관행은 파이리츠가 8월 중순 4위에서 극적으로 반등하여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치열한 디비전 우승 경쟁을 벌였던 시즌에 시작되었다. 시즌 마지막, 파이리츠는 필리스와의 4연전을 모두 이겨야 우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금요일 밤 더블헤더를 모두 승리한 후, 스타젤은 시즌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경기 1회 말에 만루 홈런을 쳐 4-1 리드를 잡았지만, 팀은 경기 후반 역전을 허용하며 아쉽게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스타젤은 1978년 팀을 "역대 최고의 팀"이라고 칭하며 다음 해 월드 시리즈 우승을 예견했다.

1979년 파이리츠에서 1루수로 활약하던 모습.


1979년, 파이리츠는 스타젤의 예견대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4월 말 내셔널 리그 동부 최하위였던 팀은 시즌 후반 극적인 역전승을 거듭하며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쟁 끝에 시즌 마지막 날 디비전 우승을 확정했다. 팀의 주장이었던 스타젤은 시스터 슬레지의 히트곡 "We Are Family"를 팀의 비공식 응원가로 채택하며 팀을 하나로 묶었다. 그의 리더십과 활약은 팀 동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는 NLCS와 월드 시리즈 모두에서 MVP를 수상했다. 특히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는 경기 후반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극적인 결승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이 홈런은 시리즈 3번째 홈런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스타젤은 1971년과 1979년 두 번의 월드 시리즈 7차전 모두에서 결승 득점을 기록했다. 1979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파이리츠는 1925년에 이어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3승 1패의 열세를 두 번이나 극복하고 우승한 팀이 되었다. 스타젤은 시리즈에서 30타수 12안타, 3홈런, 4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총 7개의 장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레지 잭슨1977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운 월드 시리즈 최다 장타 기록과 타이를 이루는 것이었다.

NLCS MVP와 월드 시리즈 MVP에 더해, 스타젤은 마침내 39세의 나이로 NL MVP를 수상했다(세인트루이스키스 에르난데스와 공동 수상). 이로써 그는 한 시즌에 정규시즌 MVP, NLCS MVP, 월드 시리즈 MVP를 모두 석권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또한, 피츠버그 스틸러스쿼터백 테리 브래드쇼와 함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선정하는 "올해의 스포츠맨" 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파이리츠 감독 척 태너는 "스타젤을 팀에 두는 것은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으며, 팀 동료 알 올리버는 "만약 그가 우리에게 포트 피트 다리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다이빙을 원하는지 물어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며 스타젤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증언했다. 팬들과 동료들은 그를 '팝스(Pops,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표했다.

3. 3. 1980년대

1980년 프레드 로저스와 스타젤


스타젤은 1982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1979년 이후로는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한 시즌에 74경기 이상 출전하지 못했다.[10] 그는 선수 생활의 많은 기간을 센터 필드 거리가 약 139.29m에 달했던 포브스 필드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 47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은퇴했다. 명예의 전당 헌액자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스타젤이 포브스 필드에서 8시즌 동안 좌익수와 중견수 방향으로 400개에 달하는 플라이볼을 담장 근처까지 보냈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포브스 필드의 우익수 펜스는 파울 폴대까지 약 91.44m였고, 높이 약 6.10m가 넘는 스크린이 우익선에서 우중간 약 114.30m 지점까지 이어져 있어 홈런을 치기 어려운 구조였다.

1970년 중반, 파이리츠가 홈 구장을 타자에게 비교적 중립적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으로 옮기면서 스타젤의 파워 수치는 향상되었다. 그는 당시 3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기록한 통산 475개 홈런 중 310개를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쳤다. 그의 두 번의 홈런 타이틀도 스리 리버스에서 뛴 첫 3년 동안 나왔다.

스타젤의 마지막 경기는 1982년 10월 3일,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그는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 상대 투수 스티브 로저스를 상대로 안타를 쳤고, 이후 대주자 더그 프로벨로 교체되었다.[11]

은퇴 직전인 1982년 9월 6일, 그의 등번호 '''8'''번은 피츠버그 파이리츠 구단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 4. 장거리 홈런 기록

한때 스타젤은 거의 절반에 달하는 내셔널 리그(NL) 구장에서 가장 긴 홈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9년 8월 5일, 스타젤은 앨런 포스터를 상대로 홈런을 쳤는데, 이 홈런은 경기장을 벗어나 약 154.53m를 기록하며 다저 스타디움에서 나온 가장 긴 홈런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1973년 5월 8일, 앤디 메서스미스를 상대로 다저 스타디움 밖으로 두 번째 홈런을 쳤으며, 이 홈런은 약 143.26m로 측정되었다. 다저 스타디움 밖으로 넘어간 홈런은 지금까지 단 4개뿐이며, 그중 2개를 스타젤이 기록한 것이다. 다저 명예의 전당 멤버인 돈 서튼은 스타젤에 대해 "나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투수들을 단순히 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존심을 빼앗는다."라고 말했다.

1971년 6월 25일, 스타젤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14-4로 승리한 경기에서 베테랑스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긴 홈런을 기록했다.[12] 이 홈런은 2회 초 선발 투수 짐 버닝을 상대로 터졌으며, 버닝은 이 홈런 이후 강판되었다. 공이 떨어진 지점은 스타젤이 사망한 2001년까지 흰색 원 안에 검은색 "S"가 새겨진 노란색 별로 표시되었으며, 2001년 스타젤이 사망한 후 흰색 원이 검은색으로 칠해졌다.[13] 이 별은 경기장이 철거된 2004년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197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웨인 트위첼을 상대로 스타젤은 올림픽 스타디움의 상단 데크(클럽 데크)에 도달한 유일한 페어볼을 쳤다. 이 홈런은 약 163.07m로 측정되었으며, 홈런이 떨어진 좌석은 노란색 좌석으로 교체되었고, 상단 데크의 다른 좌석은 빨간색이었다. 2004년 엑스포스가 떠난 후, 해당 좌석은 제거되어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으로 보내졌다.

4. 은퇴 이후

현역 은퇴 후 사인회에서 (1983년)


은퇴 후 스타젤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2년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1루 코치를 맡았으며, 선수 시절과 같이 등번호 8번을 달았다. 그는 치퍼 존스의 첫 마이너 리그 타격 코치이기도 했다.[16] 1988년, 그는 자격 첫 해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같은 해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그의 명예의 전당 헌액을 기념하기 위해 '윌리 스타젤의 밤' 행사를 계획했으나, 스타젤은 구단이 그를 감독직 후보로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으로 팀의 계획 참여를 거부했다.[6]

1985년 피츠버그 약물 재판 과정에서, 전 동료 선수였던 데일 베라와 존 밀너는 스타젤이 선수들에게 암페타민(속칭 "그린스")을 배포했다고 증언했다.[18] 베라는 스타젤과 빌 매들록으로부터 암페타민을 얻었으며, 스타젤에게는 "요청하는 날이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17] 스타젤은 이러한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으며[18], 당시 커미셔너였던 피터 우버로스는 이후 스타젤과 매들록의 혐의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23]

1997년 스타젤은 친정팀 파이리츠로 돌아와 단장 캠 보니페이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파이리츠 구단주 케빈 맥클래치의 특별 야구 자문으로 일했으며, 맥클래치는 스타젤을 "최고의 품격 있는 인물"이라고 칭했다.[14] 그러나 은퇴 후 체중 증가로 건강 문제를 겪기 시작했고, 파이리츠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하면서 체중은 더욱 늘어났다. 1999년에는 밝혀지지 않은 장기 문제로 3주간 입원하기도 했다.[19] 그는 고혈압, 심장병, 신부전 등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갔으며, 2000년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의 마지막 경기에 시구자로 나섰을 때는 휠체어를 이용해야 했다.

수년간 신부전으로 고통받던 스타젤은 사망 2년여 전 장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담낭 수술에서 회복 중이던 2001년 4월 9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서 뇌졸중 관련 합병증으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0] 그의 사망 이틀 전인 2001년 4월 7일, 파이리츠의 새 홈구장 PNC 파크 개장식의 일환으로 그의 실물보다 큰 동상이 제막되었다.[14] 스타젤이 사망한 날은 PNC 파크의 공식 개장 경기일과 같았고, 이 동상은 사실상 그를 기리는 기념비 역할을 했다.

스타젤의 등번호 '''8'''.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 결번으로 1982년 지정.


한편, 파이리츠 구단은 1982년 9월 6일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5. 유산 및 평가

피츠버그 파이리츠1982년 9월 6일에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 결번했다.[21] 그는 자격 첫 해인 1988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6]

1999년에는 ''The Sporting News''가 선정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에서 81위에 올랐으며,[2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는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고, 2000년 시즌 이후 팀의 이적 전에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시구를 했다.

스타젤이 사망한 후, 동료 선수였던 조 모건은 "내가 선수로 뛰었을 때 600명의 야구 선수가 있었는데, 그중 599명이 윌리 스타젤을 사랑했다. 그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도 깎아내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었다."라고 회고했다.[23]

윌리 스타젤 재단은 신장 질환의 연구와 치료를 장려하기 위해 설립됐다.[24] 챔피언 엔터프라이즈는 피츠버그의 불우한 아동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는 윌리 스타젤 기념 시상식 만찬을 후원한다.[25] 스타젤은 또한 겸상 적혈구 빈혈증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0년대 초 이 질병을 "국가적 건강 문제"로 규정한 직후 흑인 운동선수 재단(BAF)을 설립했다. 10년 동안 BAF는 윌리 스타젤 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 질병에 대한 연구 기금과 대중의 인식을 높였다. 1981년부터 겸상 적혈구 빈혈증 인식 및 기금 모금은 점차적으로 The Sickle Cell Society Inc.에 의해 인수되었고, 윌리 스타젤 재단은 신장 질환의 치료 및 연구를 위한 기금 모금으로 활동 방향을 전환했다.[26][27][28]

그의 청소년 시절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앨라미다에는 주요 간선 도로인 윌버 “윌리” 스타젤 애비뉴(Wilbur “Willie” Stargell Avenueeng, 구 팅커 애비뉴)가 있으며, 이는 구 앨라미다 해군 항공 기지와 연결되어 있다. 5번가 교차로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와 광장이 조성됐다.[29] 2001년 4월 7일, 스타젤이 사망하기 이틀 전, 그의 실물보다 큰 동상이 PNC 파크에서 열린 파이리츠의 새로운 경기장 개장식의 일환으로 공개됐다.[14] 그의 죽음은 레즈와의 경기에서 경기장의 공식 개장일과 같은 날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 동상은 스타젤을 위한 사실상의 기념비 역할을 했다.

주요 수상 내역
상 이름수상 횟수수상 연도
시즌 MVP1회1979년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1회1979년
월드 시리즈 MVP1회1979년
로베르토 클레멘테상1회1974년
루 게릭상1회1974년
컴백상1회1978년
해치상1회1978년
베이브 루스상1회1979년


6. 수상 및 영예

참조

[1] 웹사이트 Willie Stargell at the Baseball Hall of Fame http://baseballhall.[...] baseballhall.org 2011-12-31
[2] 웹사이트 Monument dedicated to Alameda legend Willie Stargell https://www.mercuryn[...] 2023-12-29
[3] 웹사이트 Biography: Stargell, Wilver Dornell (Willie, Pops) http://pabook.librar[...] Penn State University 2013-08-24
[4] 서적 The Good, the Bad, & the Ugly: Pittsburgh Pirates: Heart-Pounding, Jaw-Dropping and Gut-Wrenching Moments From Pittsburgh Pirates History https://books.google[...] Triumph Books 2016-08-07
[5] 웹사이트 April 17, 1964 Pittsburgh Pirates at New York Mets Play by Play and Box Score https://www.baseball[...]
[6] 문서 James Forr
[7] 웹사이트 Willie Stargell Top Performances At Retrosheet https://retrosheet.o[...] 2023-12-20
[8] 뉴스 Telegraph Herald https://news.google.[...] 1974-10-09
[9] 웹사이트 September 30, 1978 Philadelphia Phillies at Pittsburgh Pirates Box Score and Play by Play https://www.baseball[...] 2010-01-23
[10] 웹사이트 Willie Stargell Statistics https://www.baseball[...] Sports Reference, LLC 2013-08-24
[11] 웹사이트 Montreal Expos at Pittsburgh Pirates Box Score, October 3, 1982 {{!}} Baseball-Reference.com https://www.baseball[...]
[12] 웹사이트 June 25, 1971 Pittsburgh Pirates at Philadelphia Phillies Box Score and Play by Play https://www.baseball[...] 2009-04-03
[13] 뉴스 Stargell's star a lasting tribute; Blast is marking point for all hitters http://philadelphia.[...] 2009-04-03
[14] 웹사이트 Stargell was Pirates' inspirational leader in '70s https://www.espn.com[...] ESPN Classic 2013-11-07
[15] 웹사이트 Willie Stargell Career Statistics https://baseball-ref[...]
[16] 웹사이트 In a time of upheaval, a constant remains — Chipper Jones http://blogs.ajc.com[...] The Atlanta Journal-Constitution 2013-08-24
[17] 뉴스 Willie Stargell Gave Out Amphetamines, Dale Berra Testifies https://www.latimes.[...] 1985-09-10
[18] 뉴스 "The Cocaine Agonies Continue" https://web.archive.[...] 1985-09-23
[19] 뉴스 Stargell hospitalized, undergoing treatment https://news.google.[...] 1999-09-02
[20] 서적 Willie Stargell: A Life in Baseball https://books.google[...] McFarland
[21] 서적 Willie Stargell Chelsea House Publishers
[22] 간행물 The Sporting News Selects Baseball's 100 Greatest Players http://www.sportingn[...] 1999-04-26
[23] 웹사이트 Obituary: Willie Stargell: Numbers couldn't measure the man http://old.post-gaze[...] Post-Gazette 2013-08-24
[24] 웹사이트 Mission Statement http://www.williesta[...] Willie Stargell Foundation 2013-08-24
[25] 웹사이트 City of Champions http://kumiteclassic[...] Kumite Classic 2013-08-24
[26] 웹사이트 Willie Stargell: Numbers couldn't measure the man http://old.post-gaze[...] 2014-03-15
[27] 웹사이트 Sickle Cell Society Inc/Murray – Irvis Genetic Disease Center: A History of Care http://newpittsburgh[...] 2014-03-15
[28] 웹사이트 The Williie Stargell Foundation Website http://www.williesta[...] 2014-03-15
[29] 뉴스 East Bay Times https://www.eastbay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